훈민정음 해례본은 잘 쓰여진 특허명세서

2024-03-28 767
#스타트업

특허제도는 특허법 제1조에 명시된 바와 같이 기술발전을 촉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혁신적 발명에 특허권을 부여하여 기술혁신의 동기를 부여하는 대신, 해당 발명의 내용을 공개함으로써 특허받은 발명을 그 기술 분야의 통상의 지식을 가진 자(보통 ‘통상의 기술자’라 한다)가 쉽게 실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특허제도의 핵심 원리이다. 특허명세서에 기재된 발명이 ’통상의 기술자’가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기재되지 않으면, 심사관은 특허 등록을 거절한다.

 

혁신적인 발명을 쉽게 활용하도록 기재하기는 사실 어려운 노릇이다. 우선 ‘진보성(inventiveness)’이라는 특허 요건은 특허받고자 하는 발명이 ‘통상의 기술자’의 기술 상식에 비추어 쉽게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기존의 알려진 것들로부터 쉽게 설명 가능하다면, 그렇고 그런 별 의미 없는 발명 즉, 진보성이 약한 발명일 것이다. 다음으로 발명자 입장에서 기술 공개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의도도 발명을 제대로 공개하는 것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특허제도에서는 특허명세서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구성 요소를 공통의 규칙으로 정하여 발명이 쉽게 설명될 수 있는 최소한의 형식을 정하였다. 즉 특허명세서에는 [배경기술], [해결하고자 하는 과제], [과제 해결 수단], [발명의 효과] 및 [발명의 실시를 위한 구체적인 내용]으로 구분하여 반드시 해당 부분이 기재되도록 하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이라는 문자 체계의 사용 방법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해설서이다. 해례본은 세종이 직접 지은 <어제 서문>과 본문에 해당하는 〈어제 예의(例義)〉, 집현전 학자들의 공동으로 쓴 〈해례(解例)>와 정인지가 쓴 〈후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허명세서가 발명이 쉽게 실시할 수 있도록 적혀 있는지 판단하는 것이 업무인 특허심사관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필자가 ‘훈민정음 해례본’을 처음 접했을 때 잘 쓰여진 특허출원서 및 특허명세서를 읽는 느낌이었다. 

 

<정인지 후문>에는 1443년 겨울,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만드시고 ‘훈민정음’이라 칭하셨으며 1446년 9월 상순에 공포한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특허 출원서의 발명의 명칭, 발명자의 이름 및 공고일에 해당하는 것이다. 

 

세종이 직접 지은 <어제 서문>에는 한국말은 중국말과 다르므로 한자로는 제대로 표기하기 어렵고, 우리의 고유한 글자가 없어서 문자 생활의 불편이 매우 심하다고 전제한 뒤 ‘백성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 사람마다 편히 쓰게 하고자 함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즉 우리에게 익숙한 ”나·랏:말·미 中國·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어제 서문>은  특허명세서의 [해결하고자 하는 과제]에 해당한다. <어제 예의>는 한글 28자의 모양을 보여주고 그 운용 방법을 적시한 내용으로 특허명세서의 [과제 해결수단]으로 발명의 핵심내용인 것이다.

 

<정인지 후문>에는 28자로 전환이 무궁하며, 간략하면서 요령이 있고 자세하면서도 통달하게 된다. 지혜로운 자는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 한자로 쓰인 책을 풀이하면 그 뜻을 알 수 있다. 송사를 살피면 그 실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음악을 기록하면 율려를 조화롭게 한다. 바람소리, 학 울음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짖슨 소리라 하더라도 모두 표현해 쓸 수 있다고 적혀 있다. 필자가 특허심사관 재직시 특허의 진보성을 판단할 때 가장 먼저 살펴보는 특허명세서의 [발명의 효과]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필자가 가장 감동한 부분이다. 

 

’해례’ 부분에는 1)글자 창제 원리(제자해), 2)초성글자(초성해), 3)중성글자(중성해), 4)종성글자(종성해), 5)초중종 글자를 합한 글자(합자해)에 대한 해설과 글자를 활용한 예시(용자례)가 기재되어 있다. 특허명세서로 말하자면 [발명의 실시를 위한 구체적인 내용]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해례>의 제자해 부분을 살펴보면, 천지만물의 원리는 오직 음양오행인데, 사람의 말소리도 이 원리에 따를 수 밖에 없다고 한다. 훈민정음을 만들 때 이 원리를 깊이 추구하였으므로 훈민정음은 천지만물의 이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만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특허법상 발명으로서 성립되지 않는 경우 특허로서 보호받지 못한다. 특허법상 발명의 성립성은 특허법 제2조 제1호에 규정된 「자연법칙을 이용한 기술적 사상의 창작으로서 고도한 것」을 만족하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여기서 「자연법칙을 이용」의 의미와 훈민정음의 천지만물의 원리에 충실한 것은 일맥상통하는 의미이다. 

 

혁신적인 발명을 하는 것과 이러한 발명을 누구나 이해하도록 설명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오히려 천재적인 발명자일수록 그 발명을 제대로 전파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인지 후문>에는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상세하게 해석을 더하여 해설과 예시를 추가하여 해설서를 만들라고 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총 64면(페이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해례’ 부분만 51면으로 풍부히 할애되어 있다. 풍부한 실시 예를 적어둠으로써 천지개벽 같은 발명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제대로 된 해설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술사업화 시장에서 돈이 되고 무효에 강한 특허도 이러한 실시 예가 풍부한 발명들이다. 훈민정은 ‘해례본’이라는 이름에도 나타나듯이 ‘해례’ 부분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각 문자를 발음될 때의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는 ‘해례’ 부분의 ‘제자해’를 보고 현대의 음운학자들이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해례본’이 위대한 점은 ‘해례 부분’이 그것이 발명자인 세종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전파시켜야 할 관료, 특히 당대의 성리학자들이 작성했다는 점에서 놀라운 것이다. 혁신적인 기술일수록 통상의 기술자가 쉽게 실시하기 어렵다. 관료들이 ‘통상의 기술자’의 관점에서 세종대왕이 발명한 한글을 연구하고 이를 활용하기 위한 기술해설서를 작성한 만큼 천지개벽의 새로운 문자의 활용성을 높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해례본에도 적혀 있듯이 어리석은 자라도 ‘통상의 기술자’가 되어 열흘만에 그 발명을 쉽게 활용할 수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탄생한 것이다.

 

기업가(entrepreneur)는 ‘시도하다’, ‘모험하다’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사전적 의미의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은 ‘모험적이고 창의적인 정신’을 의미한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기업가(entrepreneur)를 ‘혁신을 일으키는 개인들’로 사업가(businessman)과 구분하여, ‘부를 창출하기 위해 새롭고 어려운 것에 도전하는 사람’으로 정의하였다. 그는 기업가의 혁신적 역할을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로 표현하면서 경제 활동에서 혁신을 추구하는 유형으로 △새로운 제품 개발, △새로운 생산 방법의 도입, △새로운 시장 개척, △새로운 공급처, △새로운 조직 구조의 실현을 언급한다. 슘페터는 이와 같은 혁신을 추구하는 경제 주체들의 노력과 열정을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이라 칭하며, 단지 비스니스 성공에 국한되지 않고, 경제 성장과 사회 발면을 이끄는 핵심 동력으로 강조하였다.

 

훈민정음은 세종이 나이 47세가 되는 해인 1443년 겨울에 발명을 완성(창제)하였으며 3년 뒤인 1446년(세종의 나이 50세) 오늘날 한글날이 되는 때에 반포하였다. 세종은 말년에 시각장애를 앓았으며 당뇨병을 앓는 등 1450년 54세로 승하할 때까지 안 좋은 건강으로 고생하였다. 오랜 시간 한자가 문자 생활의 중심이었던 세상에서 이제까지 만나 보지 못한 새로운 문자인 한글을 실시하게 하는 것은 천지개벽과도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노환으로 인한 말년의 고통 속에서 백성이면 누구나 쉽게 실시할 수 있는 기술해설서인 ‘해례본’을 집현전 학자들에게 완성시키게 하고, 끈기있게 기다리는 그 3년간의 세종의 인내와 열정이야말로 켄텍 학생들에게 필자가 가르치고 싶은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이다.

 

켄텍은 학부 교육 과정에서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을 공과대학 최초로 독자적인 교육 영역으로 설정하여 강조하고 있다. 

 

사진은 2022년 3월 1기 학생들이 RC 첫 수업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배포하여 수업을 진행하는 모습이다.

 

 

< 특허명세서의 모든 것을 갖춘 훈민정음 해례본 >

특허명세서의 항목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의 해당 내용 발췌

배경기술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천자 자연의 문자가 있다. 옛날 신라의 설총이 처음 이두를 만들었으나 한자를 빌려 쓰는 것이라 비루하고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말과 말사이에 만분의 일도 통할 수 없다<정인지 후문>

해결하고자 하는 과제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로 쓴 글로는 서로 통하지 않는다. 백성 중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어제 서문>

과제 해결수단

‘ㄱ’은 어금닛소리로, 君(군) 자의 처음 발하는 소리와 같다. 
‘l’는 侵 자의 중성과 같다. 종성은 초성을 다시 쓴다. 
ㆍ, ㅡ, ㅗ, ㅜ, ㅛ, ㅠ는 초성 아래에 붙여 쓰고, ㅣ, ㅏ, ㅓ, ㅑ, ㅕ는 오른쪽에 붙여 쓴다. 무릇 글자는 반드시 합해져서 소리(음절)를 이룬다. <어제 예의>

발명의 효과

28자로 전환이 무궁하며, 간략하면서 요령이 있고 자세하면서도 통달하게 된다. 지혜로운 자는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 한자로 쓰인 책을 풀이하면 그 뜻을 알 수 있다. 송사를 살피면 그 실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음악을 기록하면 율려를 조화롭게 한다. 바람소리, 학 울음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짖슨 소리라 하더라도 모두 표현해 쓸 수 있다. <정인지 후문>

발명의 실시를 위한 구체적 내용

초성, 중성, 종성 셋은 어울려 글자를 이룬다. 초성은 중성의 위에 있기도 하고, 중성의 왼쪽에 있기도 한다. 君(군)의
ㄱ이 ㅜ의 위에 있고, 業(ᅌᅥᆸ)의 ㆁ이 ㅓ의 왼쪽에 있는 따위와 같다. <해례 합자해>
초성 ㄱ의 예로는 감(柿)을 뜻하는 ‘:감’, 갈대(蘆)를 뜻하는 ‘.ᄀᆞㄹ’이 있다. <해례 용자례>

청구항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사용함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어제 예의]

전하께서, 상세히 해석을 가하여 여러 사람들을 깨우쳐 주라고 명하셨다. <정인지 후문>

※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특허청구항에 해당하는 내용은 없다. 발명자가 권리를 청구하지 않는 무권리를 주장하는 청구항인 셈이다. 한글은 백성들이면 누구든지 새로 만든 글자를 자유롭게 활용하도록 하는 자유 기술이기 때문이다.

KENTECH 부경호 교수 작성

※ 본 글은 지식재산 전문 미디어인 아이피데일리(https://www.ipdaily.co.kr)에 기고한 필자의 글을 바탕으로 추가 재작성하였음

댓글

훈민정음과 특허를 매개로 좋은 인사이트를 주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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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좋은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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